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문단 편집) === 통치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거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내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 이미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했으며, 농사 짓는다는 핑계로 신민들이 이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즉, 이 정책도 프로이센 따라하기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교육개혁의 책임자였던 펠비거의 학제 발표를 보면 '양성 청소년 교육을 시행한다'라고 규정이 있었다. 즉, 여성들 또한 교육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여성들을 탄압했다는 평을 주로 듣는 가운데 의외인 부분.] 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서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델'''로 여겨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은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지만, 적국인 프로이센을 배우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100년 전 [[프리드리히 빌헬름|대선제후]] 시절에 했던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도입함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의 오스트리아의 지방 행정은 충성 서약을 받은 봉건 영주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각 왕국/공국에 중앙에서 임명한 총독을 내려보내고, 중앙 관청을 설립하여 각 지방에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를 국가 조직에서 배제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헝가리 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방을 크라이스(Kreis)라고 불리는 행정 단위로 구분하여 중앙집권을 안정화시키고, 지주의 횡포로부터 농민을 보호했다.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분리하는 한편, 대법원을 설치하고 <테레지아 법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오스트리아 민법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조세 제도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으며[* 프랑스 왕실이 귀족과 성직자에게 면세특권을 계속 부여하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난 것을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일반징세대장이 도입되었다. 예수회로부터 대학에 관한 감독 권한을 빼앗아 고등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만드는 동시에, 빈 의대를 설립하였다. 초등 의무 교육 외에도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시범학교를 도입했다. 슐레지엔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상주의]]에 입각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독점 기업을 불허하였고, 길드 규약을 철폐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섬유 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국 발전과는 별개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을 배신하고 카를 알브레히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내심 원한을 품었고 보헤미아 왕국 대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우대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조]] 군주들의 천대를 받은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는 날까지 헝가리 왕국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이주 정책을 통하여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헝가리 왕국 북부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했던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의 광공업을 크게 증진시켰다. 하지만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 한때 퐁파두르에게 'cousin'이라고 쓴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는 추문이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한 번도 퐁파두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당대 예법으로는 신분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데 편지를 썼을리가 없다.]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과 갈등을 빚었고, 이게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퍼지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뒤바리 부인과 화해할 것을 지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 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해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국왕(1741~1780), 보헤미아 국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 에르데이 여대공(1765~1780),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여왕(1772~1780), 부코비나 여공(1775~1780), 밀라노 여공(1740~1780)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황제'로 취급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별개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정식으로 계승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군연합을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위인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7년 전쟁의 실패와 남편 프란츠의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국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영향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요제프는 아버지처럼 어머니에게 휘둘리지만은 않았다.]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 물론 아들 많다고 후계자를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도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승계했고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은 현직 왕이라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훗날 손자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로는 1세) 시절 승계자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는 신체 장애에 정신지체까지 앓던 폐인이었지만 다른 이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조차 꺼내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요제프 2세|해당 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공동 통치자의 지위를 주었지만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었다.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 영토 문제에 있어서 아들의 팽창 정책인 1차 폴란드 분할(1772년)이 개시되기 전에도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1769년에 제국 내 위치한 폴란드 왕국령의 월경지를 침략하여 무단으로 합병하였는데, 이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의 [[부코비나 공국|부코비나]]를 합병하는 것은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적인 가톨릭 도덕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당대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계몽전제군주를 꿈꿨던 요제프 2세는 항상 대립했고,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이러한 면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말년에 가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호흡곤란, 통증, 잦은 기침, 피로에 시달렸고 나중에 가면 부종까지 왔다.] 결국 1780년 11월 29일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기 직전에 국내에 있는 자녀들을 모두 불러[* 외국에 있는 자식들은 오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장남 [[요제프 2세]]에게 "이리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죽음|긴 여행]]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남긴 날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한다. 사후 장례식이 치루어지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대로 빈의 무덤에 먼저 사망한 남편 프란츠 1세의 관 옆에 안장되었다. 이때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모친의 사망이 얼마나 슬펐던지 마리아 테레지아가 숨을 거둔 후 며칠 동안이나 어머니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요제프 2세는 정치적으로는 어머니와 자주 대립했지만, 그래도 모자간의 정이 깊어 어머니를 계속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의 경쟁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사망 소식에 사절을 보내서 슬퍼하고 애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